본문 바로가기
비하인드 스토리

'5천만 달러에 사세요' 넷플릭스의 제안을 걷어찬 블록버스터 — 그리고 29년

by 박Info 2026. 7. 11.

 

2000년 초, 텍사스 댈러스. 르네상스 타워 27층의 널따란 회의실로 두 남자가 들어섰다.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와 공동창업자 마크 랜돌프. 맞은편에는 당시 세계 홈엔터테인먼트 시장을 지배하던 거인, 블록버스터가 앉아 있었다. 회사 규모 60억 달러, 전 세계 매장 약 9천 개. 헤이스팅스는 훗날 회고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블록버스터는 우리보다 천 배는 컸다. 나는 마크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이 들고 간 제안은 이랬다. 우리 회사를 5천만 달러에 사가라, 그리고 온라인 사업 블록버스터닷컴을 우리가 운영하겠다. 당시 넷플릭스는 DVD를 우편으로 빌려주는 작은 스타트업이었고,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다음 장면을 랜돌프는 저서 『That Will Never Work』에 이렇게 적었다. 5천만이라는 숫자가 나온 순간, 안티오코의 진지하던 표정이 입꼬리 한쪽이 슬쩍 올라가며 흔들렸다고. "존 안티오코는 웃음을 참으려 애쓰고 있었다." 안티오코는 넷플릭스를 그저 자잘한 틈새사업으로 봤고, 제안은 그대로 묻혔다. 랜돌프는 훗날 이날을 더 짧게 요약했다. 블록버스터가 "우리를 비웃으며 방에서 내쫓았다"고.

그때 5천만 달러를 아꼈다고 좋아했을 그 회사는 결국 2010년 파산했다. 그리고 비웃음을 사고 돌아온 그 작은 회사, 넷플릭스는 세상이 영상을 소비하는 방식을 통째로 바꿨다. 2026년, 그 회사를 세운 헤이스팅스가 29년 만에 넷플릭스를 완전히 떠났다.

늦게 반납한 비디오 때문에 창업했다?

넷플릭스의 시작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일화가 있다. 헤이스팅스가 영화 '아폴로 13'을 늦게 반납해 연체료 40달러를 물게 됐고, 열받아서 "연체료 없는 비디오 대여점"을 만들기로 했다는 이야기. 깔끔하고 극적이라 지금도 여기저기 인용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 공동창업자가 직접 "지어낸 얘기에 가깝다"고 밝혔다. 마크 랜돌프는 여러 인터뷰에서 저 연체료 신화를 "편리한 허구"라고 불렀다. 우리 회사가 왜 경쟁사보다 나은지를 설명하기에 딱 좋은 이야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랜돌프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 시작은 훨씬 밋밋했다. 1997년, 두 사람은 "무언가의 아마존"을 만들자고 마음먹었고, 우편으로 부칠 수 있다는 이유로 DVD를 골랐다. CD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부쳐보고 멀쩡히 도착하는지부터 실험했다고 한다.

극적인 창업 신화가 꼭 사실은 아니라는 것. 이걸 창업자 본인 입으로 인정했다는 게 오히려 이 회사다운 대목이다.

DVD를 우편함에 넣던 회사

넷플릭스는 1997년에 세워졌다. 시작은 앞서 말한 대로 DVD 우편 대여였다. 빨간 봉투에 DVD를 담아 보내주고, 다 보면 우체통에 넣어 반납하는 방식. 연체료가 없고 월정액으로 원하는 만큼 빌려 보는 구조가 당시로선 신선했다.

블록버스터에 회사를 팔려던 2000년의 그 굴욕이 전환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거절당한 뒤 넷플릭스는 자기 길을 갔고, 몇 년 뒤 결정적 승부수를 던진다. 2007년, DVD를 우편으로 부치는 대신 인터넷으로 영상을 바로 흘려보내는 스트리밍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잘 팔리던 DVD 사업을 스스로 흔드는 도박이었다. 미국 CNN은 헤이스팅스가 이끄는 동안 넷플릭스가 "먼저 DVD 우편 사업으로, 몇 년 뒤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전 세계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을 정의했다"고 정리했다.

그 뒤 넷플릭스는 남의 콘텐츠를 틀어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오리지널 시리즈로 판을 키웠고, 나중에는 광고를 붙인 저가 요금제까지 들여왔다. 한때 자기를 비웃던 거인들을 다 지나쳐버린 것이다.

"창업자도 진화해야 한다"

정점에 선 창업자가 자리를 내려놓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2023년 1월 19일, 헤이스팅스는 25년간 앉아 있던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넷플릭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사회 집행의장으로 옮기고, CEO 자리는 테드 서랜도스와 그렉 피터스 두 사람의 공동 체제로 넘어갔다.

이때 헤이스팅스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넷플릭스 뉴스룸에 직접 이렇게 썼다. "우리 이사회는 여러 해 동안 승계 계획을 논의해왔다(창업자도 진화해야 하니까!)." 등 떠밀려 나가는 게 아니라 오래 준비한 세대교체라는 점을, 스스로 가벼운 농담까지 섞어 밝힌 것이다. 실제로 서랜도스는 이후 피터스와 CEO 역할을 나눠 맡으며 회사를 이어갔다.

29년 만의 완전한 퇴장

그리고 2026년, 마지막 장이 왔다. 미국 CNN은 4월 16일 넷플릭스의 1분기 실적 발표를 전하며, 헤이스팅스가 6월 임기 만료와 함께 이사회 재선에 나서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CEO에서 집행의장으로 물러난 지 3년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퇴장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헤이스팅스는 2026년 6월 4일 연례 주주총회를 끝으로 넷플릭스 이사회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다. 25년간 CEO를 지낸 창업자가, 1997년 회사를 세운 지 29년 만에 완전히 손을 뗀 것이다.

떠나는 이유도 헤이스팅스답다. 버라이어티는 헤이스팅스가 "자선활동과 다른 개인적 일들에 집중하기 위해" 이사회를 떠난다고 전했다. 그 '다른 일들'에는 본인이 소유한 유타의 스키 리조트를 돌보는 것도 포함된다고 한다. 세상을 바꾼 회사를 만든 사람이, 마지막엔 기부와 스키장을 이유로 조용히 걸어 나갔다.

걷어찬 5천만 달러의 값

다시 2000년 댈러스의 회의실로 돌아가 본다. 그날 블록버스터가 5천만 달러를 아꼈다고 안도했을 때,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 작은 회사가 훗날 블록버스터를 지도에서 지우고, 전 세계 수억 명의 저녁 시간을 가져갈 거라는 걸.

헤이스팅스의 29년을 관통하는 건 결국 '자기 사업을 스스로 흔드는 용기'였던 것 같다. 잘나가던 DVD를 접고 스트리밍으로 갈아탔고, 남의 콘텐츠로 돈 벌다 직접 제작에 뛰어들었고, 정점에서 CEO 자리를 스스로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사회 자리까지. 거인에게 비웃음을 사고도 판을 뒤집은 사람의 마무리치고는, 놀랄 만큼 담담한 퇴장이다.